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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과 고등학교 1학년 때 두 번의 전신마취 수술을 받았었다. 선천성 토순, 그것도 안팍 모두가 째진 언청이로 태어난 때문이었다. 두 시기 모두 나름대로 예민했던 시기라, 그때의 기억들이 선명하다.

초등학교 1학년, "나"라는 자의식이 자리할 무렵, 말도 제대로 못하는 병신 째보라고 시도 때도 없이 놀림받는 게 싫어 학교 가기를 피한 탓에 받게 된 첫 수술의 기억들..., 하얀 침대보에 쌓인 병실 침대 위에 처음 누웠을 때의 그 서늘했던 감촉, 링거액에 섞인 마취제가 손, 발, 가슴을 마비시켜갈 때 느꼈던 죽음의 감촉, 사라져 가는 의식 끝자락에 들었던 절규,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병원의 복도 유리창 너머로 지켜보던 회복기의 오후들...

두 번째 수술에 따른 기억은 첫 번째 수술에 비하면 아주 단순하다. 의사의 희망적 전망과는 달리 두 번째 수술도 별다른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때문이었다. 조롱받는 조건에서 벗어나면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일이 너무도 많았기에, 용납되어지지 않는 좌절들을 내보낼 출구가 없는 심리적 공황...
타인들의 몰상식하고 무책임한 조롱들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미련하고 무책임한 짓인지를 이해하기엔 역부족이었던 탓 일게다.

장애자를 멸시하는 수준이라면 세계의 으뜸을 다툴 것이 분명한 한국에서 생존을 꾀하는 장애자로써 겪어야 했던 절망과 분노..., 각자의 다름을 포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역감정을 뿌리깊게 심은 용서될 수 없는 죄악으로 심판 받아 마땅한 6, 70년대를 살아내며 봉착했던 좌절들..., 절망과 분노와 좌절이 빚어내는 그 지옥 속에서 막혀가던 젊음의 숨통을 뚫어준 것은 우연찮게 수련할 기회가 주어진 요가였다.

요가를 통해 만나게 된 인도..., 책이나 소문을 통해 듣는 인도의 수행자 혹은 성자들과의 만남을 꿈꾸며 이룰 수 없는 것들에의 욕망을 잠재우고, 소금이 뿌려질 때마다 길길이 날뛰는 상처들의 아우성을 달랬지만, 그러나 인도로 가는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처음 요가를 만난 지 15년이 지난 후인 30대 후반, 길다면 긴 3년의 외국생활을 접고 황급히 당도한 인도..., 내가 오기를 재촉하며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던, 아니 기다려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그럴 것으로 믿었던 성자 혹은 수행자가 신호를 보내야 하는데..., 그러나 기다리는 신호는 어디에서도, 누구를 통해서도 전해지지 않았다.

"당신이 오지 않으면 내가 가리라"..., "비록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 믿음이 진실된 믿음이라면 산을 옮길 수 있다"라는 예언서의 말을 진실이라고 강변하는 자신을 향해, 당신이 진정한 예언자라면 그 말을 실증해보라는 청중의 비웃음 섞인 재촉이 쏟아지자, 건너편의 산에게 "이리 오너라"를 명령했던 예언자 마호메드, 자신의 명령과는 달리 다가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 산을 행해 첫 발을 띄며 당당하게 그가 밷었다던 말, "당신이 오지 않으면 내가 가리라"...
성자를 찾아, 눈 밝은 수행자를 찾아 인도 전국을 정처 없이 떠다니던 걸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그 누구"를 찾아 내일을 기약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것이 산 너머의 무지개를 쫓는 허망한 짓에 지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삶을 위해 없으면 안 되는 것들이라 여겼던 짐들을 고개 하나 넘을 때마다 버릴 수 있었고, 듣거나 읽어서 챙긴 지식들이 본래의 나로부터 나를 멀리 떨어뜨리는 비열한 독에 지나지 않음을 절감하게 되는 정화의 시간을 덤으로 남겼으니..., 떠나야 할 때가 다시 있다면, 언제라도 망설이지 않고 떠나야 할 방랑길이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그 무엇"을 찾는 허망한 숨바꼭질이 덤 챙기는 방랑 통해 빛을 바래가며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리는 듯 싶었지만, 산을 만나면 산에 걸리고 물을 만나면 물에 걸리는 것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었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이 따로 없고,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없고, 가야할 곳이 따로 없고, 가고 싶은 곳이 따로 없는 처지가 되었으니, 하늘 아래 머리 둘 곳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알려진 수행자 혹은 성자를 찾아다니던 초기의 열병 같은 기간을 지나친 후에도 아쉬람에서 아쉬람으로 이동하며 인도를 떠돌던 것은 따로 머리 둘 곳을 찾아서가 아니라, 숙명처럼 다가선 사람이나 사건을 통한 계기들을 통해서였고, 아쉬람에 거주하는 것이 주머니 가벼운 여행자가 목숨을 연장시키는 가장 저렴한 방법이었던 때문이었다. 타협할 수 없는 날들이 그렇게 흘러갔다.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다는 다짐을 반복하게 만들던 늪, 그러나 헤어날 기약 없어 보이는 그 늪, 벗어나는 유일의 방법으로 삼았던 '나'와 이 늪이 지금 얼마마한 거리를 두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한 뿌리에 지나지 않은 듯 싶다가도 문득 천리, 만리나 떨어져버린 듯이 느껴지는 "그 무엇"과의 숨바꼭질이 어느 단계쯤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안팍이 나뉘어지지 않는 것과의 숨바꼭질이 남긴 안타까움이 기억되는 게 탈일 뿐이리라는 사족을 떼지 못하는 게 병이리라... 

그 허망한 날들이, "나보다 더 나를 잘 안다"고 설치는 허튼 머시기 따위가 끼어 들만한 자리를 가지 끝에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의 한가로움이 채우도록, 그냥 그렇게 흐를 수 있는 여유 아닌 여유를 남겼다는 걸 천만다행으로 여길 밖에 없다면, 그도 그만이다.

정무진 _()_
사단법인 한인교류회 상임이사
Indo-Korean Foundation

- 2002년 4월 22일, "청년의사일보"에 실렸던 글을 수정 보완한 글,
- 2002년 5월 08일, 해남 대둔사(대흥사) 홈페이지 "세간한담"에 기고
Posted by 한국인도교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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